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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는 납작하고 둥근 금속제 타악기로, 한 쌍을 양손에 들고 넓은 면을 맞대어 소리를 내는 불교 의식용 법구이다.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 <「대안3년」명 청동바라>는 국내에 현존하는 바라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인 1087년(고려 宣宗 4년)에 제작된 유물로, 총 4점 중 3점에는 동일한 명문이 새겨져 같은 해에 함께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 1점은 사용 중 파손 등으로 인해 이후 짝을 맞추기 위해 추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바라는 방짜 기법으로 두드려 만들었으며, 중앙에 반구형 돌출부와 손잡이용 구멍을 갖춘 구조로, ‘大安三年歲次丁卯七月日造廣州牧官春秋般若道場鈸者’ 이라는 명문을 통해 광주목관이 봄·가을에 설행한 반야도량에서 사용하기 위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중국 당대 바라와 유사한 형식을 보여 통일신라 바라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기준 자료로, 제작 시기·주체·사용 목적이 명확히 밝혀진 점에서 고려시대 불교 의식구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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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 <「을사」명 청동 금고>는 불교 의례에 사용된 범음구 가운데 하나로, 청동으로 제작된 타악기이다. 지름 46.0cm 규모로, 앞면을 당좌구·내구·외구의 동심원 구획으로 나누고, 당좌 중앙에는 연자를, 내구에는 간엽이 표현된 연판문을, 외구에는 운문을 표현하였다. 뒷면에는 너비가 넓은 전과 폭이 좁은 공명구를 두고, 상부 측면에는 고리를 달아 용가에 걸어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옆면에 음각된 명문을 통해 1185년(을사년) 6월 인복사에 봉안하기 위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왕실 일원의 장수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한 발원 내용도 함께 드러난다. 이 금고는 뒷면의 전이 넓고 공명구가 좁은 고려 청동금고의 2형식에 해당하며, 당좌구에 자방이 정착한 점은 12세기 후반의 특징을, 연판문 사이에 간엽이 표현된 점 등은 13세기 초의 양식을 반영하여, 고려 청동금고 양식이 변화하는 과도기적 모습을 잘 보여주는 핵심 자료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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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 <부석사명 향완>은 1739년에 제작된 불교 공양구로, 사찰 의례에서 향을 공양하는 데 사용된 기물이다. 이 향완은 노신, 간주, 원형 받침대로 구성된 고배형 향완의 기본 구조를 갖추면서도, 몸체를 원통형으로 만들고 구연의 전에 동 테두리를 두르는 등 고려시대 향완과는 구별되는 세부 형식을 보인다. 철제 주물 바탕에 은을 쪼음입사로 시문한 제작 기법은 조선 후기 철제 공예의 특징을 반영하며, 철제 향완 가운데 쪼음입사 기법이 적용된 유일한 사례로 알려져 있다. 명문을 통해 제작 시기와 사용처가 ‘己未年 三月日, 太伯山 浮石寺’임을 알 수 있고, 준제다라니와 팔괘 등의 문양 사용을 통해 당시의 신앙 경향도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이 작품은 고려 고배형 향완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재료와 기법, 장식에서 새로운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로, 조선 후기 불교공예의 제작 경향과 기술적 전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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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납석사리호는 통일신라 9세기(863)에 제작된 왕실 발원 사리용기로, 곱돌을 가공해 만든 항아리형 기물이다. 구연부가 넓고 어깨가 부풀며 하부로 갈수록 좁아지는 안정된 기형으로, 9세기 신라 사리용기의 전형적인 조형을 보여준다. 표면 전체에 흑칠을 하고 구연부와 저부에 연화문·화문을 새겨 장식하였다. 몸체 외면에는 井자형 구획을 나누어 그 안에 7자 38행의 명문을 음각하였는데, 제작 연대와 발원 배경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다. 이 명문에는 경문왕이 함통 4년(863)에 민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동화사 비로암에 삼층석탑을 건립한 사실과 불사에 참여한 승려와 관원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어 역사 기록물로서 가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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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 〈백자 청화 「홍치2년」명 송죽문 항아리〉는 1489년에 제작된 청화백자로, 구연 내면에 새겨진 ‘홍치(弘治)’ 라는 명문을 통해 제작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작은 구연과 풍만한 어깨, 잘록한 허리를 갖춘 기형은 조선 전기 백자 항아리 가운데에서도 어깨와 허리의 대비가 뚜렷한 형태로, 생동감 있는 조형미를 보여준다. 구연부에는 연꽃 넝쿨무늬를 두르고 몸체 전면에는 소나무와 대나무를 대담하게 배치하여 길상적 의미를 강조하였다. 이 항아리는 조선시대 궁중의 연례와 각종 의식에서 꽃을 꽂아 두는 화준(花樽)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후 지리산 화엄사에 전해져 오랫동안 사찰에 봉안되었으며, 도난과 회수의 과정을 거쳐 현재 동국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