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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의 역사

명진학교에서 동국대학교까지 120년의 발자취
역사를 넘어 미래로, 새로운 100년의 시작

동국을 빛낸 사람들

120년 역사 속 동국의 인물들

각 시대를 이끌며
동국정신을 실천한 인물들의 삶과 업적을 기록합니다.

  • 석전 박한영 프로필 사진

    석전 박한영

    1870~1948


    천재들의 스승

    석전 박한영
    석전 박한영

    석전 박한영 스님(1870~1948)은 한국불교의 대강백이다. 인문학의 개척자이고 교육의 선구자였다. 또한 3.1만세혁명 이후 결성된 한성임시정부와 조선민족대동단에 참여했던 항일지사였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어둡고 습한 시대를 살았지만 그는 맑고 곧았다. 행적과 사상이 세속에도, 친일에도 물들지 않은 청정비구였다. 그래서 해방 이후에는 한국불교 첫 교정(종정)에 추대되었다

    당대의 천재들이 석전을 스승으로 모셨다. 근대화의 문을 열어젖혔던 최남선·이광수·정인보·홍명희·변영만 등이 박한영 앞에서 두 손을 모았다. “나는 누구에게도 물어볼 것이 없는데, 선생에게는 물어볼 것이 있었다.”(최남선) “문장을 지을 때나 선리(禪理)를 펼칠 때에도 걸리거나 막히는 바가 전혀 없었다.”(정인보)

    문인들도 박한영의 샘에서 물을 길어다 자신의 글밭을 적셨다. 김동리·이병기·조지훈·서정주·신석정·김달진 등이 박한영의 가르침을 받았다. “내 뼈와 살을 데워준 스승이다”(서정주) “스승의 교훈을 나는 좌우명으로 삼아 살고 있고, 또 숨을 거두는 날까지도 가슴에 지니리라”(신석정). 또 독립운동가 이동녕·오세창·권동진·이상재 등과도 교유했다.

    석전은 동서의 사상에도 막힘이 없어 서학의 무분별한 유입에 사상적 응전을 했다. 또 한시 600수를 남긴 시승(詩僧)이었고, 시상이 그윽하고 담백해서 묵객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석전은 시대의 큰 그릇이었다. 그 안에는 지식뿐만 아니라 천하의 인재들도 담았다. 훗날 훼절한 제자들도 있었지만 스승은 언제나 제자리에 있었다. 자신을 지킨 자도, 회유에 넘어간 자도, 이름을 팔아 영화를 산 자도 석전 만은 깎아내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세상에는 스님의 진면목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스스로 명예를 탐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석전시초(1940)
    석전시초(1940)
    석전문초(1962)
    석전문초(1962)

    석전은 최초의 불교학교인 명진학교가 1906년 개교한 이래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불교고등강숙, 불교중앙학림, 불교전수학교, 중앙불교전문학교, 혜화전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특히 불교고등강숙에서는 교장을, 중앙불교전문학교에서는 학장을 지냈다. 또 혜화전문학교 시절에는 명예교수로 강단에 섰다. 1930년대 중앙불교전문학교는 한국 인문학의 산실이었다. 불교정신을 계승하여 정신문화를 이끌었고,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담론을 생산했다. 당대 최고의 학자와 학생들이 모여서 종교, 철학, 역사, 문학 등 인문학의 불을 밝혔다. ‘인문학의 제국’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이런 학풍 속에는 신학문의 체계를 세운 석전의 지혜와 상상력이 스며있다.

    석전의 강의는 학교에서만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1926년 개운사 대원암에 불교 전문강원이 문을 열었고, 강원측은 당시 강학의 최고봉이었던 석전을 강주로 초빙했다. 석전이 지키는 대원암은 해를 거듭할수록 명성이 높아지고 비범한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비록 성 밖에 있었지만 대원암 강원에서는 향학의 불이 꺼지지 않았다. 소문을 듣고 새 지식에 목마른 장안의 인재들이 외진 대원암을 찾아와 가르침을 받아갔다.

    노장사상을 통섭하고 서양학문 또한 넓고 깊이 알았던 석전은 학인들에게 천하서 읽기를 권장했다. 세상을 알아야 민족의 내일을 개척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학인들은 마르크스의 <자본론>,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루소의 <에밀> 등을 읽고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대원암 강원에는 많을 때는 100여명의 학인들이 무릎을 맞대며 공부했다. 모두가 형편이 어려워 석전은 이들의 학비와 숙식비 마련이 늘 걱정거리였다. 월급이나 강사료 등 돈이 생기면 모두 강원 운영비로 내놓았다. 석전의 대원암 시대는 20여 년간 지속되었다.

    석전의 사상과 문장은 워낙 깊고 넓어서 범접하기 힘들다. 겉모습은 굽은 소나무처럼 소탈했지만 내면은 산위에 우뚝 솟은 바위처럼 우람했다. 오로지 수행과 인재 양성에만 매진했던 이타적인 삶은 추적할수록 경이롭고 신비롭다. 만해 한용운도 석전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그의 그늘에서 쉬고 싶어 했다. 1948년 봄볕이 맑고 고운 날, 내장산 벽련암에서 홀연 육신의 옷을 벗었다. 임종게를 짓거나 읊지 않았고, 유언도 없었다. 죽음도 석전다웠다. 구름으로 얼굴을 가린 수줍은 해처럼, 그렇게 숨어버렸다.

    천재들의 스승, 석전 박한영 도서 표지

    <김택근, 『천재들의 스승, 석전 박한영』 저자>

  • 만해 한용운 프로필 사진

    만해 한용운

    1879~1944


    침묵의 시대, 깨어있는 정신

    1926년 희동서관에서 간행된 『님의 침묵』 시집
    1926년 희동서관에서 간행된 『님의 침묵』 시집

    만해 한용운 선사(1879~1944)는 어둠이 짙게 깔린 일제강점기, 한국 불교를 혁신하고 꺼져가던 민족의 혼을 되살린 불굴의 지도자였다. 승려이자 시인, 그리고 치열한 사상가였던 그는 오늘날 동국대학교의 정신적 뿌리이자 한국 지성사의 거대한 산맥으로 남아 있다.

    187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만해 선사는 일찍이 나라의 위인들을 흠모하며 그 기개를 닮고자 했다. 1905년 설악산 백담사에서 출가하고, 고성 건봉사에서 ‘용운(龍雲)’이라는 법명을 받았지만, 그는 산속의 고요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참선 수행과 더불어 민족의 아픈 현실을 깊이 고뇌했던 그는, 불교가 세상을 구원하는 힘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1910년, 그가 펴낸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惟新論)』은 이러한 신념의 결정체였다. 그는 평등과 자각, 진보를 외치며 불교가 산중을 떠나 민중의 삶 속으로, 역사의 현장으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사상은 식민지 조선의 해방과 인간 존엄을 동시에 추구하는 근대 불교사상의 초석이 되었고, 이후 그의 문학과 독립운동을 지탱하는 단단한 철학적 기반이 되었다.

    행동하는 지성인이었던 한용운은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을 주도했다. 체포되어 3년간의 옥고를 치르는 동안에도 그는 일제에 굴복하지 않았다. 간디의 비폭력·불복종 정신에 공명했던 그는 무력보다는 도덕적 저항과 민족 계몽을 통해 조선의 양심을 대변하고자 했다. 출옥 후에도 물산장려운동과 신간회 활동을 통해 종교와 이념, 계층을 아우르는 민족 협동 전선을 구축하며 대중과 함께 호흡했다. 특히 말년에는 성북동에 거처인 ‘심우장(尋牛莊)’을 마련하여, 불교 경전을 번역하고, 문학 작품을 집필 및 연재하는 데 온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불교유신을 바탕으로 민족독립으로 나아가고자 했는데, 그 연결점을 민족의식 고취 즉 민중계몽으로 보고, 3·1운동에 버금가는 문화실천운동을 꿈꾸었던 것이다.

    그의 치열한 저항 정신은 문학을 통해 더욱 찬란하게 피어났다. 1926년 발간된 시집, 『님의 침묵』은 사랑과 이별, 그리움의 정서를 통해 민족의 상실감과 광복에 대한 염원을 절묘하게 교차시킨 걸작이다. 그에게 ‘님’은 사랑하는 연인이자, 빼앗긴 조국이며, 끝내 도달해야 할 진리인 부처였다. 그의 시 세계에서 이별은 결코 절망적인 종말이 아니었다. 만해 선사는 떠난 님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역설적인 믿음, 즉 ‘이별은 미의 창조’라는 변증법적 인식을 통해 슬픔을 새로운 희망의 에너지로 역전시키는 놀라운 문학적 성취를 보여주었다. 개인적 사랑의 감정을 민족적 열망과 자비의 철학으로 승화시킨 그의 시(詩)는 한국 저항시의 영원한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동국대 만해시비&gt;
    동국대 만해시비

    만해 선사는 또한 불교의 대중화와 교육 근대화에도 앞장섰다. 승려 교육을 혁신하고 종단을 민주적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식민지 사회에서 불교가 민족 주체성을 회복하는 정신적 구심점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는 1906년 명진학교와 불교전문학교를 모태로 출발한 동국대학교의 설립 정신과 맞닿아 있다. 근대 교육과 불교 개혁을 결합하고자 했던 동국대학교의 120년 역사에서 한용운은 명예 1회 졸업생으로서 빼놓을 수 없는 선구자이다.

    오늘날 동국대학교와 불교계는 만해다례재, 만해대상, 만해문학상, 학술대회 등을 통해 그의 뜻을 기리고 있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인물을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과 자유, 민족과 인류 공영’이라는 만해 선사의 유산을 현재의 교육 이념으로 계승하려는 실천적 노력이다. 식민지의 고통 속에서도 자비와 자유를 결합해 독창적인 해방 사상을 꽃피웠던 만해 한용운. 그의 올곧은 정신은 시대를 넘어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당신을 보았습니다. 한용운의 삶과 문학 도서 표지

    <고재석, 『당신을 보았습니다 한용운의 삶과 문학』 저자>

  • 범산 김법린 프로필 사진

    범산 김법린

    1899~1964


    일평생 독립운동과 민족불교 발전, 후학양성 헌신

    파리 유학시절 김법린(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파리 유학시절 김법린(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범산 김법린 선생(1899~1964)은 1899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신령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은혜사를 거처 범어사 명정학교에서 근대식 학문을 공부했다. 평소 공부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선생은 명정학교에서 다양한 근대학문을 접하며 열심히 공부했고, 명정학교 졸업 후 범어사의 지원으로 1917년 서울로 유학하여 1918년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학림에 입학했다. 이렇게 시작된 동국대학과의 인연은 그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동안 이어졌다. 특히 중앙학림에서 만해 한용운 선사를 만나 평생 스승으로 따르며 조국의 현실에 대한 고민은 더욱 구체화되었고, 이후 지식인으로서의 책임과 실천으로 이어졌다.

    1919년에는 3.1운동에 참여한 후 부산 범어사로 내려가 동래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동지들과 상해로 밀항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며,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 모금과 항일운동 조직 결성을 위해 국경을 넘나들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와 통제가 강화되고 임시정부의 사정이 어려워지자 조국의 장래를 위해 고민하던 선생은 1920년 프랑스로 건너가 고학으로 파리대학 철학과를 3년 만에 졸업했다. 또한 어렵고 바쁜 시간을 쪼개어 파리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조직하였고, 한인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1927년에는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벨기에에서 개최된 세계 피압박민족 반제국주의대회에 참석하여 독립의 정당성을 세계에 알리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김법린 선생의 활동은 국내에서도 주목을 받았고, 불교계의 귀국 요청을 받아 1928년 8년 만에 귀국하였다. 이후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불교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겸비한 학자로 교육을 통한 인재육성과 계몽운동을 병행하였고, 다솔사·해인사·범어사에서 불교 교학 강의와 함께 불교청년회 활동을 통해 불교혁신운동에도 적극 참여하는 등 교육계몽과 사회참여를 실천에 옮기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그러나 다시 일제의 감시와 통제가 더욱 강화되어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되자 1930년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비밀결사조직인 만당을 창당하여 핵심 멤버로 활동하였고, 이듬해에는 다시 일본으로 유학하여 공부하면서 만당 동경지부장으로 활동했다.

    김법린의 귀국소식이 실린 &lt;조선일보&gt; 1928.1.16.기사
    김법린의 귀국소식이 실린 <조선일보> 1928.1.16.기사

    다음 해 귀국한 선생은 다시 국내에서 활동을 재개하며 우리말 연구와 보급에도 적극 참여하여 차세대 지도자로 주목받았으나, 일제의 요시찰 인물로 경성에서 활동에 큰 제약을 받게 되자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다솔사로 활동 공간을 옮겼고, 해인사를 거쳐 다시 정신적 고향인 범어사로 돌아와 교육과 불교혁신운동 등에 매진하였다. 이후 만당사건과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모진 고문을 받으며 옥고를 치루고 1945년 출옥하여 부산 범어사에서 건강을 회복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선생은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서울로 상경하여 일제에 협력한 불교계 지도부를 쫒아내고, 교단을 접수하여 산적한 현안 문제들의 해결에 나섰다. 이후 불교 교단 총무원장, 관선 입법의원, 문교부장관, 민의원을 지내며 불교계의 개혁과 건국의 기틀을 다지는 일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리고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초대회장 등을 역임하며 민간외교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고, 특히 인재육성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선생은 모교인 동국대학 발전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광복한 해 11월 혜화전문학교로 빠르게 개교하였고, 1946년에는 혜화동에 있던 모교를 동국대학으로 승격하여 현재의 남산캠퍼스 위치로 이전하였으며, 1953년 문교부장관시절 종합대학으로 승격되는 과정에서도 기여하였다.

    1963년에는 동국대학교 제4대 총장을 지내며 대학을 대학답게 만들기 위해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열정을 불태웠고, 오늘날의 동국대학교의 기틀을 다져 놓았으나 과로를 견디지 못하고 1964년 3월 14일 심장마비로 순직하셨다.

    조선어학회사건 수난자동지회와 함께한 김법린(가운데 줄 오른쪽 세 번째)
    조선어학회사건 수난자동지회와 함께한 김법린(가운데 줄 오른쪽 세 번째)

    김법린 선생은 20세기 한국불교를 대표하며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였고, 행정가·정치가·교육자·민간 외교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근·현대 지성인으로 1995년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리고 2012년 6월에는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에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나비야 청산가자, 김법린 도서 표지

    <김진섭, 『나비야 청산가자, 김법린』 저자>

  • 백성욱 프로필 사진

    백성욱

    1897~1981


    근대 한국불교의 혁신과 오늘날 동국대 교정을 만든 주역

    조선불교선교양종대회
    조선불교선교양종대회

    백성욱(白性郁, 1897~1981)은 다방면에서 놀라운 능력과 업적을 보여준 인물이다. 근현대 불교계 위인들 중에서 가장 다채로운 스펙트럼으로 빛나고 있다.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이자 불교학자이자 저술가이자 교육가이자 정치가이자 CEO이자 도인(道人)이었다. 장관을 지낸 스님이자 대학 총장을 했던 사업가다. 아울러 이러한 발군의 힘은 수행(修行)에서 나왔다. 오랜 참선과 독경으로 깨달음에 이르렀고 세속의 모든 지혜와 역량은 여기서 나왔다.

    1897년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 백성욱은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운 영재였다. 일찍 고아가 되면서 절에 맡겨졌고 자연스럽게 출가의 길로 들어섰다. 1917년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학림(中央學林)에 입학한 백성욱은 1919년 3·1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체포에 나선 일본 경찰을 피해 중국으로 탈출했고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약했다. 해외에서 선진문명의 놀라움을 경험하면서 청운의 꿈을 키웠다. 유럽으로 건너가 5년여의 정진 끝에 꿈을 이뤘다. 1925년 뷔르츠부르크대학에서 <불교순전철학(佛敎純全哲學)>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일 최초의 한국인 박사가 탄생한 순간이다.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

    귀국 후 중앙학림의 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 곧 동국대 교수에 취임했다. 조선불교청년회를 복원하면서 불교의 쇄신과 자강에도 앞장섰다. 1929년 ‘조선불교선교양종대회’를 통한 종헌(宗憲) 제정에 기여하면서 현재 한국불교 최대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의 기반을 닦았다. 이후 출가수행자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모든 공직을 버리고 강원도 오대산 적멸보궁에 들어가 100일 기도에 몰입했다. 100여 명이 제자들이 동참한 ‘금강산 수행결사’를 이끌며 한국불교의 청정성 회복에 힘썼다.

    1945년 조국은 마침내 해방을 맞았고 제4대 내무부장관으로서 국정의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 했다. 한국전쟁 발발 이듬해인 1951년 피란수도였던 부산에서 국영기업인 한국광업진흥주식회사 사장으로 일하며 전국의 금광을 개발해 국가재정을 키웠다. 제3·4대 부통령선거에 도전하기도 했다. 제2대 동국대 총장으로서 혁혁한 공적을 세운 뒤에는 <금강경(金剛經)> 지도로 후학 양성에 매진하며 여생을 아름답게 마쳤다.

    서울의 중심인 남산 자락에 위치한 동국대학교 캠퍼스는 최고의 경관을 자랑한다. 대학본부와 명진관이 있는 학교의 중심에 서면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들 건물은 모두 백성욱 박사가 제2대 총장(1953~1961)으로 재임하던 시절 만들어졌다. 학자이자 동문으로서 모교의 발전을 위해 인생을 바쳤다. 한국전쟁 휴전 직후인 1953년 11월 간이 식장에서 총장 취임식을 치르고는 곧바로 학교의 본격적인 재건을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명진관 건립 중 백성욱 총장과 교직원들
    명진관 건립 중 백성욱 총장과 교직원들

    전후 복구를 위한 기술인력을 길러내기 위해 이과(理科)를 새로 창설했다. 이학부를 신설하고 강의실을 늘리면서 학생 정원도 대폭 증원했다. 종합대학교의 위상에 걸맞은 본관 건물 건립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1956년 12월 근대식 석조 디자인의 본관이 완공됐다. 1957년 3월에는 낡고 오래된 교사를 허물고 과학관 공사에 착수했다. 규모도 상당히 큰 데다가 어느 대학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초현대식 설계와 공법이 이루어졌다.

    과학관을 다 짓자마자 대학본부 공사에 착수했다. 1958년 10월 완공된 대학본부 안에는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중강당이 들어섰다. 중앙도서관과 대학원 건물 역시 백성욱의 손으로 빚어졌다. 이로써 팔정도 광장을 중심으로 한 동국대의 교정이 완성됐다. 자금을 조달하고 건설을 총지휘한 백성욱의 독보적인 헌신으로 연건평 1만 평이 넘는 대규모 종합대학으로 성장했다. 대한민국 3대 사학이라 하기에 손색이 없게 됐다. 그 시절 그와 함께 학교에서 가르치거나 일했던 사람들은 “오늘날의 동국대는 백성욱의 사리(舍利)”라고 말한다.

    교직원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학생들을 자식처럼 아끼며 자비 보살이라 칭찬받았다. 교수로서도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인류문화사를 강의하는 ‘월요특강’에는 중강당이 매번 빈 자리 없이 꽉 채워졌다. 동서양의 문화사 전반을 꿰고 있는 박학다식은 경이로웠다. 과학과 심리학은 물론 약학까지 다뤘다. 금강경에 달통한 도인이 불교를 기반으로 세상의 영원한 이치를 풀어내는 통찰과 화술은 그야말로 천재적이었다. “청년은 사막에도 기와집을 지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격려에 제자들은 웅지(雄志)를 품었다.

    땅에서 일어난 하늘, 백성욱 도서 표지

    <장웅연, 『땅에서 일어난 하늘, 백성욱』 저자>

  • 혜정 손석재 프로필 사진

    혜정 손석재

    1882~1959


    동국대 남산캠퍼스의 초석을 놓다

    손석재 선생 사리탑
    손석재 선생 사리탑

    상록원 뒤 계단을 따라 남산산책로 올라가다 보면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에 사리탑 하나가 나온다. 혜정 손석재 선생을 기억하기 위한 기념 사리탑이 그것이다.

    손석재 선생(1882~1959)은 1882년 금강산 장안사 근처에서 태어났는데 그녀의 탄생은 처음부터 신비로웠다. 오체투지(온몸을 던져 부처님께 절을 함)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온 그녀는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공부하다 50일 만에 숙명통이 열리고, 1930년 금강산 마하연에서 삭발 수계를 했다고 한다. 이런 그녀에게 특별한 제자가 한 명 있었는데, 동국대학 전 총장이자 내무부 장관까지 지낸 백성욱 박사다.

    백성욱 박사는 1919년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경성불교중앙학림 졸업 후, 상해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유럽으로 건너가 1925년 한국인 최초로 독일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지식을 나누고자 대학 강단에 섰으며 많은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백 박사가 더 큰 불교적 깨달음을 얻고자 금강산 수행 길에 오르면서 그들의 인연은 시작됐다. 1928년 장안사에서 시작된 그들의 인연은 곧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나아가게 되는데, 손석재 선생의 지혜와 높은 경지에 이른 도를 느끼고 그녀를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힘들었던 시절인 1953년 백성욱 박사는 동국대학교 제2대 총장으로 취임한다. 그는 안정적인 교육 환경 조성을 위해 중구 필동 지금의 남산캠퍼스를 확장하고 대학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이런 그를 뒤에서 도운 이들 중 한 분이 바로 혜정 손석재 선생이다. 그녀는 백 박사가 총장으로 취임하자 4,500만 원의 거액을 재단에 기부했다. 당신 쌀 한 가마의 가격이 980원이었다고 하고, 당시 중고등학교 재단 설립은 30만 원이면 가능했다고 하니 엄청난 금액이 아닐 수 없다. 그녀가 기부한 기부금은 장학재단 설립과 명진관을 비롯한 동국대의 주요 건물을 건설하는데 사용됐다. 백성욱 총장과의 인연으로 거액을 희사하여 남산캠퍼스의 초석을 놓은 손석재 선생은 1959년 7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팔정도 청동여래입상
    팔정도 청동여래입상

    백성욱 총장은 대학에 큰 기부를 실천한 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1953년 손석재 선생 동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4·19 혁명을 거치면서 동상은 크게 파손됐다. 이후 1964년 백성욱 총장은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동상을 녹여 김영중(1926~2005) 작가를 통해 지금의 팔정도 불상(청동여래입상)으로 만들었다. 225cm 높이의 입상은 연꽃대좌 위에서 모든 중생의 온갖 근심과 걱정을 없애 주는 시무외인 수인(手印)과 중생이 원하는 바를 달성하게 하는 여원인 수인을 하고 있다. 다리에 양감을 표현해 중생에게 다가가는 걸음을 내딛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손석재 선생과 동국대학교와의 인연은 청동여래입상과 명진관을 통해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 미당 서정주 프로필 사진

    미당 서정주

    1915-2000


    겨레의 시인

    평생 출간한 15권의 시집들
    평생 출간한 15권의 시집들

    한국문학사의 가장 큰 시인 미당 서정주(1915-2000)는 1915년 전북 고창군 선운리에서 빼앗긴 나라의 백성으로 태어났다. 우울과 낙망의 시대를 방황과 반항으로 버티던 젊은 영혼은 석전 박한영 대종사의 권유로 1935년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입학했고, 그 이듬해 운명적으로 시인이 되었다. 23살에 쓴 「자화상」에서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라고 외쳤고, 27살에 『화사집』이라는 첫 시집으로 문학적 상상력의 신대륙을 발견하여 한국문학의 역사를 바꾸었다. 문학평론가 이남호는 “1941년에 우리가 일본보다 더 훌륭한 것을 만들어 일본을 압도하고 민족적 자존을 높인 유일한 사례가 『화사집』”이라고 말한 바 있다.


    미당은 창작 기간만 70년에 이르고 발표작이 천 편이 넘는다 미당처럼 . 좋은 시를 많이 쓴 시인은 세계문학사에서도 그 예가 흔치 않다 미당이 . 15 남긴 권의 시집은 제각기 시의 밤하늘에 빛나는 큰 별들이다.

    미당은 새 시집을 낼 때마다 새로운 시적 세계를 창조했다. 놀라운 미적 체험을 하게 해주는 『귀촉도』는 그리움과 슬픔, 전통적 서정이 아름답게 반짝이는 시집이다. 『서정주시선』은 삶의 고달픔과 비천함을 감싸안고 거기서 아름다움을 이끌어 내는, 매우 고귀하고 따뜻한 마음을 보여 주는 시집이다. 『신라초』에서는 신라 정신에서 한국적 사유의 원형을 찾아내고, 『동천』에서는 겨레의 삶 속에 녹아 있는 마음과 정서와 지혜를 노래한다. 이러한 시집들은 모두 국보급 문화재라 하겠다.

    그러나 미당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국보급 문화재를 창조해 낸다. 그의 상상력은 어린 시절 고향의 기억을 변용하여 한국의 신화를 새롭게 해석한다. 그것이 『질마재 신화』다. 우리는 『질마재 신화』에서 우리 겨레가 오래전부터 지니고 살았던 삶의 방식과 가치를 웃음과 함께 만날 수 있다. 『떠돌이의 시』에서는 넉넉한 여유와 풍류의 정신으로 세상의 고달픔을 넘어서는 경지를 보여 주고, 기행시집 『서으로 가는 달처럼…』에서는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며 미당 특유의 세계 견문기를 펼친다. 또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와 『안 잊히는 일들』, 『노래』에서는 겨레의 과거와 자신의 과거에서 소중한 것들을 찾아내고 기록해 둔다.

    고희를 넘긴 미당은 『팔할이 바람』, 『산시』, 『늙은 떠돌이의 시』, 『80소년 떠돌이의 시』 등의 시집을 계속 펴내며 세상을 굽어보고 보듬어 안으면서 자신의 삶을 시로 만들었다. 미당은 우리말을 가장 능수능란하고 아름답게 구사한 시인이며, 또 그의 시에는 우리 겨레의 마음이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

    미당(未堂)은 서정주의 호이다. 시인은 ‘영원히 소년이고자 하는 마음’으로 풀이한다. ‘아직 사람이 덜 되었다’라는 겸손과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의미가 담겼다. 실제로 미당은 일찍이 ‘천재 시인’으로 불렸지만 소처럼 우직하게 공부하는 태도를 좋아했다. 일흔이 넘어서도 러시아어를 배워 유학을 떠나는가 하면, 기억력의 감퇴를 막기 위해 매일 아침 세계의 산 이름을 암송했다. 그는 “세계의 명산 1,628개를 다 포개놓은 높이보다도 시의 높이와 깊이는 한정 없다”고 말했다. 그 높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장엄한 미당의 시들은 우리 겨레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동국대학교 미당문고
    동국대학교 미당문고

    시인은 결국 대표작이나 애송시로 남는다. 한국 시인 가운데 대표작이 가장 많은 시인을 꼽는다면 단연 미당 서정주다. 그가 있어 한국문학사는 한층 풍요로워졌고 또 한층 자랑스러워졌다. 미당의 시는 20세기 한국인들이 받은 가장 큰 선물의 하나다.

    한국시의 큰 별, 미당 서정주 도서 표지

    <윤재웅, 『한국시의 큰 별, 미당 서정주』 저자>

  • 무애 양주동 프로필 사진

    무애 양주동

    1903~1977


    동국대 국문과의 초석을 세운 스승

    조선고가연구(박문서관, 1942)
    조선고가연구(박문서관, 1942)

    양주동(梁柱東·1903~1977)은 1903년 6월 24일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나 황해도 장연에서 자랐다. 아버지 양원장(梁元章)과 어머니 강릉 김씨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주동은 막내였다. 다섯 살 때 아버지에게 "유합(類合)"으로 기본 한자를 배워 여덟 살에 당시(唐詩)를 외우고, 열 살 때 어머니에게 구술(口述)로 "소학""대학"을 익혔다. 아버지는 1908년 일본 경찰의 폭행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1914년 결혼했으나 어머니마저 그해 돌아가셨다. 자형의 보호 아래 사숙(私塾)을 열어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고 시회(詩會)에도 참여하며 삼국지를 원문으로 읽었다.

    1920년 중동학교 속성과에 입학하여 김종흡‧전진한‧손진태‧김동환 등과 함께 수학했다. 중학 4년 과정을 1년 만에 마치고 중동 장학생으로 1921년 조도전(早稻田)대학 예과에 입학, 불문과를 선택했다. 프랑스 문학의 데카당티즘에 심취, 백기만‧유춘섭(유엽)‧손진태 등과 의기투합하여 최초의 시 동인지 "금성(金星)"을 발간해 조선 문단을 놀라게 했다. 1925년 조도전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여 다시 동경에 갔다. 1926년 이광수의 「중용과 철저」란 평문을 읽고 「철저와 중용」을 기고했는데, 이광수가 그에 대한 반론 「철저와 중용을 읽고」를 연재함으로써 일약 문단의 기린아로 주목받았다. 1928년 김성탄의 수사법으로 토마스 하디 소설을 분석한 학위 논문(「T. Hardy 소설의 기교론」)으로 지도교수에게 큰 칭찬을 받았으며, 8월 평양 숭실대 영문과 교수로 부임하였다.

    1934년 봄 소창진평(小倉進平) 교수의 「향가 및 이두의 연구 鄕歌及吏讀の硏究」를 읽고 크게 발분(發奮), “일본에 빼앗긴 문화유산을 학문적으로 전취(戰取) 탈환해보자”란 결심으로 사뇌가 연구에 몰두하였다. 위 논문은 소창진평 교수가 경성제대 재직 시 쓴 것으로 동경제대 언어학과 주임교수로 영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뒤에 일본 학사원 은사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양주동은 소창진평 논문의 오류를 조목조목 밝힌 글 「향가의 해독, 특히 원왕생가에 취하여」를 일문으로 작성해 "청구학총"에 발표하였다(1935. 2). 이 논문이 발표되자 일본 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당시 경성제대 총장은 “이제 조선인도 공부를 시작했다”며 일본학자의 경각심을 일깨웠고, 소창진평의 스승 금택장삼랑은 양주동의 주장을 인정하며 제자의 답변을 요구했다. 이에 소창진평은 “노마(怒馬)가 늙었지만 뜻은 쇠하지 않았다. 10년 뒤 다시 양씨와 대하는 날이 있을 것이다”란 내용의 글을 "사학잡지(史學雜誌)"에 실었지만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조선일보는 양주동의 논문을 연재(1936. 1. 1∼1. 23)하는 파격을 보였고, 동아일보 또한 「고가석주(古歌釋注)」를 연재(1940. 2. 8∼7. 26)했는데, 이 글이 여요전주(麗謠箋注(1947)로 완성되었다. 양주동은 사뇌가(향가) 25수를 해석한 고가연구(1942)를 상재했다.

    ‘여요전주(을유문화사, 1947)
    여요전주(을유문화사, 1947)

    소창진평은 동경제대에서 언어학을 수학하고 유럽 유학까지 다녀와 박사학위를 받은 정통 언어학자다. 반면 양주동은 조도전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시와 비평을 한 문인이다. 양주동이 불과 4∼5개월 만에 소창진평 향가 해독의 오류를 지적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명석한 두뇌와 탁월한 암기력, 그리고 문학적 창의력 덕분이었다. 그는 소창진평과 달리 향가를 시가(詩歌)로 여겨 음수율을 고려하는 한편, 「원왕생가」 첫 구절 “月下”를 “ᄃᆞᆯ하”로 해석하는 기발한 상상력을 발휘하였다

    유쾌한 응접실 공개방송
    유쾌한 응접실 공개방송

    1947년 양주동은 동국대 국문과 교수로 부임하였다. 그가 동국대 교명을 지었다는 얘기도 전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그는 동국대를 비롯해 경향 각지 대학에 출강하였는데, 그의 강의실은 수강생 및 청강생으로 송곳 꽂을 자리도 없었고, 동아방송의 <유쾌한 응접실>은 최고 청취율을 기록할 정도로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당시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대다수 국민에게 동서고금 고전을 알기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여 그들의 교양을 높이는 데 이바지하였다.

    사뇌가(향가) 해석에서 시작한 양주동의 학문은 국어학, 고전문학, 현대문학 등 전 분야에 두루 영향을 미쳐 많은 학자와 문인 제자를 길러냈다. 동국대 국문과 재학생과 졸업생은 양주동 선생을 존경했고, ‘동대 국문과’ 다섯 글자를 자랑스럽게 외고 다녔다. 무애 양주동 박사는 ‘동대 국문과’를 한국 최고 국문과로 우뚝 세운 절대적 스승이다.

    인간 국보 양주동 도서 표지

    <장영우, 『인간 국보 양주동』 저자>

  • 조지훈 프로필 사진

    조지훈

    1920~1968


    나라를 맡겨도 좋을 사람

    혜화전문학교 시절 조지훈
    혜화전문학교 시절 조지훈

    지훈의 생애(1920-1968)는 시인이란 이름 하나로 설명하기 어렵다. 시인인가 하면 학자였고, 선비인가 하면 지사였다. 대학의 교수인가 하면 사회의 스승이었다. ‘멀티 페르소나’를 지닌 르네상스적인 인간이었다. 그토록 다양한 면모를 보였으나 말과 글과 행동이 다르지 않았다. 사유와 실천이 완벽하게 일치했다.

    피는 뜨거웠고 정신은 바위처럼 단단했다. 일제와 광복, 전쟁과 혁명... 그 험난한 세월에도 바르고 정의로웠다. 상황을 핑계로 말을 바꾸지 않았고, 때와 장소에 맞춰 낯빛과 몸가짐을 달리하지 않았다. ‘일관성’과 ‘지조’를 목숨처럼 여기며 사람과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기를 소망하였다.

    그것이 세상이 그를 따르고 공경한 까닭이었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이가 그를 기리는 이유다. 그가 재직하던 학교(고려대)는 여전히 그를 상징적 존재로 모시고 우러른다. 진리와 정의를 몸소 실천하고 행동하던 그의 투지와 용기를 섬긴다. 그는 책임과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것을 무엇보다 부끄러워했다.

    1983년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입학한 조지훈의 학적부
    1983년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입학한 조지훈의 학적부

    “...늬들 마음 우리가 안다/늬들의 공을 온 겨레가 안다./하늘도 경건히 고개 숙일 너희 빛나는 죽음 앞에/해마다 해마다 더 많은 꽃이 피리라.”(-‘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목숨을 걸고 불의에 맞선 4.19의 제자들에 보내는 뜨거운 공감과 격려다. ‘가르치기는 옳게 가르치고, 행하기는 옳게 행하지 못하게 하는 세상’임에 분개하며 주먹을 부르쥐던 스승의 통렬한 반성과 참회다.

    지훈은 어떤 시간이 와도 끝내 지키고 사랑해야 할 것이 있음을 알았다. 후회 없는 삶을 살자면 ‘죽음을 공부하자’고 했다. 망국의 청년 시절부터 껴안고 보듬었던 전통의 가치와 미덕을 탐구하는데 많은 시간을 썼다.

    진해에서 부산으로 가는 배 위에서, 왼쪽부터 조지훈·박목월·박두진
    진해에서 부산으로 가는 배 위에서, 왼쪽부터 조지훈·박목월·박두진

    대표적인 시 작품 「승무」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우리 문화를 극진한 애정과 공경의 태도로 쓸고 닦았다. 독립운동하듯이 국어학 논문을 쓰고 『한국민족운동사』, 『한국문화사 서설』을 썼다. 『지조론』을 쓰고 『채근담』을 옮겨서 인생과 인간의 정도를 밝혔다. 여러 스승의 길을 따라 걸었다.

    스승 복이 많았다. 만해와 석전, 한암 스님 등 암흑기의 등불 같은 분들로부터 눈부신 가르침을 받았다. 고향에서 배우고 익힌 유교와 한학의 바탕 위에 불교적인 사상과 철학의 깨달음이 더해졌음은 물론이다. 그 중심에 ‘혜화전문학교’가 있었다.

    인생행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스승은 한용운. 만해가 식민지에서 눈을 감지 않고 광복의 세월을 살았다면, 지훈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만해는 지훈의 ‘님’이었다. 혈관 속에 만해의 피가 흘렀다. 죽을 때까지 만해처럼 살았다. 스승을 그리며 모교 강단에 섰다. 심우장 가까이 살며 만해를 연구하고 책을 펴냈다. 역경원 위원으로 동악을 오르내렸다.

    무엇보다 자랑스런 것은 그의 이름이 ‘동국문학이 한국문학’이라는 모교의 자부심에 중요한 증표가 된다는 사실이다.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엮은 3인 시집 『청록집』(靑鹿集)에 실린 지훈의 시를 보라. 떨어지는 꽃잎 하나에서 우주를 보고, 저녁이면 외로이 흘러간 구름의 안부를 묻는다.

    3인 공동시집 『청록집』(1946년, 을유문화사)
    3인 공동시집 『청록집』(1946년, 을유문화사)

    ‘청록’은 본래 푸른 사슴의 의미지만, 지훈을 생각하면 ‘블루’와 ‘그린’으로 읽어도 좋겠다. 인류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이야기하려면 가장 중요한 키워드로 삼아야 할 색깔 아닌가. 그에게는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다는 맑고 곧은 ‘젊음의 블루’와 매일 바라보아도 그립다고 말한 ‘산빛의 그린’이 있다. 지훈은 영원히 푸른 청년이다.

    김종길 시인이 이런 말을 했다. “그에게 나라를 맡겨도 안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지훈이란 인물을 이보다 더 간결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늬들 마음 우리가 안다 시인 조지훈 도서 표지

    <윤제림, 『늬들 마음 우리가 안다 시인 조지훈』 저자>

  • 초우 황수영 프로필 사진

    초우 황수영

    1918~2011


    불교미술의 아름다움을 찾아낸 미술사학자

    개성 헌화사 7층 석탑에서 우현과 함께(1940)
    개성 헌화사 7층 석탑에서 우현과 함께(1940)

    황수영(1918~2011)은 1918년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고려의 왕도였던 개성은 왕조 500년 동안 정치와 학문, 문화가 축적된 도시였다. 이러한 역사적 환경은 그의 성장기에 정서적으로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1931년 개성 제일보통학교와 1936년 경성 제이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를 졸업한 뒤, 일본 동경제국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하였다. 이 시절 그는 전공인 경제학뿐 아니라 철학·역사·문학 등 인문학 전반에 걸쳐 폭넓게 독서하며 학문적 관심을 확장해 나갔다. 이는 훗날 불교 미술사를 연구하면서 특정 분야에 국한하지 않고 전체를 연결하는 안목을 갖추는 토대가 되었다.

    1941년 대학 졸업 후 약 3년간 대표적 학술 출판사인 이와나미 서점 편집부에서 근무하였다. 자료를 엄밀하게 정리하고 이를 공적 지식으로 정제하는 출판 실무의 과정을 몸소 익혔고, 이는 그의 연구 태도와 학문적 기준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

    국립박물관에서 발표하는 황수영(1948)
    국립박물관에서 발표하는 황수영(1948)


    1933년 개관한 개성부립박물관에서 황수영은 이후 학문과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에 큰 영향을 준 스승 고유섭을 만났다. 박물관장으로 부임한 고유섭은 경성제국대학(서울대 전신) 미학·미술사학과의 한국인 첫 졸업생으로, 한국 미술사 연구를 개척한 인물이었다. 황수영은 그에게서 그때까지 생소한 학문인 미술사를 처음 접하고, 개성 인근의 사찰 터와 왕궁 유적을 함께 답사하며 불교미술을 현장에서 체득하였다. 이러한 경험이 반복되면서 점차 그의 학문적 인식과 감각으로 자리 잡아 갔다. 1944년 여름 고유섭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황수영은 추도문을 낭독하며 스승의 뜻을 잇고 미술사 연구의 길에 나설 뜻을 밝혔다. 그의 학문 진로가 미술사로 분명히 정리된 것이다.

    1948년 1월 서울국립박물관에 근무하며 본격적으로 미술사 연구자의 길에 들어섰다. 이 시기에 우리 미술의 주요 유물을 직접 다루고 관찰하며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연구자로서의 기본적인 안목과 태도를 형성해 나갔다.

    경주 문무대왕릉에서 (1967)
    경주 문무대왕릉에서 (1967)


    1950년 일어난 6·25전쟁은 황수영의 삶과 학문에 또 하나의 전환점을 가져왔다. 당시 덕수궁 내 국립박물관 일대는 잇따른 폭격으로 극도의 위험에 놓였고, 박물관 건물이 화염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는 이러한 위험 속에서도 박물관을 지키며 유물 보호에 진력했다. 공산군이 박물관을 점령하고 유물의 북측 반출을 시도하자, 포장과 해체 작업을 반복하며 지연시켰고, 전황이 바뀌어 공산군이 퇴각할 때까지 이를 이어가 주요 유물들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의 혼란 속에서 결국 박물관을 떠나 가족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임시수도 부산에 머무는 동안에도 피란 온 연구자들과의 역사학 세미나에 발표자로 참여하며 학문적 활동을 이어갔다. 1953년 서울로 돌아와 1954년부터 1966년까지 동국대학교를 비롯해 서울대·연세대·고려대·건국대 등에서 강의를 맡아 연구와 교육을 병행하였다. 이 시기의 경험은 그가 이후 교육자이자 연구자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1955년 동국대 교수로 부임한 황수영은 연구와 교육을 지속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는 불교대학 인도철학과와 인문대학 사학과에서 미술사를 사료·유물·역사적 맥락을 함께 다루는 인문학적 연구로 가르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1970년대 교수연구실에서 황수영
    1970년대 교수연구실에서 황수영

    1963년 9월 개원한 대학 부설 박물관의 초대 관장으로서 부여 임강사지·구룡사지, 경주 황복사지·법광사지 등 주요 사찰 유적의 발굴 조사를 주도함으로써 유물과 연구 방면에서 가장 특징적인 대학 박물관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또한, 1965년 한일수교를 계기로 진행된 문화재 반환 협의에 우리 측 실무 대표로 참여하여, 일본으로 반출되었던 한송사지 보살상 등 1,400여 점의 문화유산이 국내로 돌아오는 성과를 이루었다.

    이러한 학문·교육·사회적 활동을 바탕으로 1982년 동국대학교 제10대 총장에 선임되었다. 재임 시 불교적 교육 이념과 인문학적 성찰을 대학의 정체성으로 정립하였다. WISE캠퍼스의 발전에도 힘을 쏟아 도서관 준공과 고미술사학과·불교학과·철학과·의예과의 신설하여 학제의 기본 틀을 마련하였다. 1986년 정년 퇴임 이후에도 명예교수로서 연구와 후학 지도를 이어갔다.

    1960~1980년대는 황수영의 학문이 정점에 이른 시기였다. 저서 40여 권과 논문 250여 편에 이르는 연구 성과 대부분이 이 시기에 집중되는데, 이는 한국 미술사학의 연구 범위와 방법이 확장·정교화되는 흐름과 맞물려 있다. 당시 한국 미술사는 학문적 제도와 연구 환경이 아직 충분히 갖추어지지 못한 상태였으나, 그는 전국 각지를 답사하며 자료를 축적하고 불교미술을 실증적으로 연구하였다.

    그 결과 불상과 사찰 유적의 편년과 양식 전개, 지역적 특성에 대한 분석이 체계화되었고, 한국 불교미술은 독자적인 연구 영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서산 마애 삼존불과 문무왕 해중릉의 발견, 석굴암 조사 등 오늘날 한국 미술사 연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되는 성과들이 그의 조사와 연구를 통해 이루어졌다. 아울러 주요 유물과 유적에 대한 지속적인 조사와 해석은 한국 불교미술의 가치와 위상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황수영은 한국 미술사학의 성립과 정착 과정을 전형적으로 체현한 연구자로 평가할 수 있다.

    불교미술의 아름다움을 찾아낸 미술사학자 황수영 도서 표지

    <신대현, 『불교미술의 아름다움을 찾아낸 미술사학자 황수영』 저자>

  • 해원 황의돈 프로필 사진

    해원 황의돈

    1887~1964


    역사와 선을 접목시킨 사학자

    선학원 중앙선원에서 하동산 선사와 함께 한 황의돈
    선학원 중앙선원에서 하동산 선사와 함께 한 황의돈

    해원 황의돈(1887~1964)은 1887년 충남 서천군 문산면에서 아버지 황기주와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해원은 할아버지 황태현에게 한학과 역사서 등을 학습하였고, 1907년 군산보통학교를 수료한 후 한성, 일본 동경 등에서 고학하였다. 1910년대를 전후하여 북간도 명동학교와 정주 오산학교, 평양 대성학교 등에서 국사를 가르치며 애국 사상을 고취시켰다. 

    그 후 휘문의숙, 보성고보 등에서 30여 년간 재직하였다. 경성 YMCA 강당에서 국사 강연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휘문의숙에서 파면됐으며, 1938년 4월 내선일체에 저항하여 보성고보를 사직하고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문화 유적을 조사 연구하였다. 일제의 시책에 비협력자로 지목되어 일본 고등경찰에 57일간 구류에 처하였다. 이에 1940년 조선일보사를 사직하고 1942년부터 해방까지 오대산 월정사 방한암 선사의 지도를 받으며 참선하였다.

    해방 후 1945년 문교부 편수관으로 역사 교과서를 편찬하면서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과 조선민족청년단 위원 등 건국 사업에 참여하였다. 한국전쟁 시 피난 중 부산 범어사에서 하동산 선사에게 지도를 받으며 참선하였다. 1951년 동국대학 교수로 취임하여 1961년까지 동 대학 사학과 교수로 11년간 재직하였다. 1955년 5월 애국가 작사자 조사를 하였고 1962년 서울시 동명 제정위원회에서 세종로와 을지로, 원효로를 지정하였다. 또한 불교 정화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고 1963년 대한불교조계종 신도회 회장 등 불교계를 주도하였다. 1964년 11월 23일 노환으로 타계하였다.

    신편조선역사
    신편조선역사
    중등조선역사
    중등조선역사

    해원은 1909년 『대동청사』를 집필하여 『독사신론』을 편찬한 신채호와 더불어 근대 역사학의 개척자로 손꼽힌다. 1920년대에 『신편조선역사』와 『중등조선역사』 등의 역사서를 편찬하고 1924년 우리나라 최초의 저작권 소송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수많은 연구와 신문 잡지 등에 논설을 발표하는 등 사학계의 태두라고 불리었다.

    그의 주요 역사 논설류는 『해원문고』 상편과 하편에 집성되었다. 단군의 재발견을 위해 이승휴의 『제왕운기』 등 한국학 전반에 걸쳐 연구하였다. 그 중 서경덕이 물질불멸론의 세계적 수창자라고 하였고 한말의 ‘계몽운동’ 관련 논문을 최초로 연구하였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1962년 대통령 문화훈장을 수상하였으며 2016년 교육부와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의 “12월의 스승”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참고로 황의돈은 그의 딸 황윤석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판사이며, 그의 아들 판사 황석연도 동국대 이사를 역임하는 등 인연이 깊다.

    그는 중등학교 역사교사로서 40년간 재직하였고 해방 후에 동국대를 비롯한 단국대, 숙명여대 등에서 10여 간 재직하면서 역사와 역사교육을 주도한 선각자였다. 부산 피난 시절인 1951년 동국대학 교양학부 교수로 위촉되었고 1953년 사학과 교수로 있다가 1961년 9월 사임하였다. 국문과의 양주동 선생과 더불어 명강의로 교내에 명성이 자자하였다.

    그는 해박한 고전에 대한 지식으로 동국사학의 초석을 닦아 이용범, 안계현, 하석 김창수(김상옥열사 조카), 조좌호(전 성균관대 총장), 김상기(전 서울대 총장) 등 교수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나아가 권상로와 이능화에서 조명기를 거쳐 안계현과 고익진, 김영태에 이르는 근대 불교사학의 전통을 잇게 하였다.

    그는 조계종 전국신도회를 주도하는 등 동국대와 불교의 흥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조선불교조계종 초대 종정인 방한암과 해방 후 불교정화운동을 지도하고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을 지낸 하동산 등 선사에게 사사받았다, 1만 8천여 시간 선원 생활을 하며 불교와 역사의 조화를 이루면서 역사학과 선학을 접목하고자 하였다. 인도의 시성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영향을 받아 “무한한 생명관을 실현하자”고 외쳤다.

    역사와 선을 접목한 사학자 황의돈 도서 표지

    <황인규, 『역사와 선을 접목한 사학자 황의돈』 저자>

  • 유현목 프로필 사진

    유현목

    1925~2009


    한국 영화계의 거목

    영화 오발탄(1961)
    영화 오발탄(1961)

    유현목(1925~2009)은 1925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났다. 그의 유년과 청년기는 식민지, 해방, 분단과 전쟁이라는 격렬한 격변의 시기와 겹쳐 있다. 이 경험은 훗날 그의 영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가난, 윤리의 붕괴, 무력감, 그리고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시대의 폭력이라는 주제의 근원이 되었다.

    1946년 유현목은 동국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1948년 당시 교수였던 시인 김기림과 양주동의 격려 아래 최초의 학생영화 <해풍>을 연출했다. 그러한 열정과 애교심은 1976년 동국대 교수로 이어진다. 그가 취임했을 당시, 한국의 영화교육은 아직 체계화되지 않은 상태였다. 영화는 기술 훈련이나 연극의 하위 영역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았다. 유현목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영화교육을 현장 중심이면서도 사유 중심적인 학문으로 정립하려 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카메라를 다루는 법보다도, “왜 이 장면을 찍는가”, “이 인물의 고통을 보여줄 자격이 있는가”를 먼저 묻는 감독이었다.

    1961년, 그는 자신의 영화 인생을 결정적으로 규정짓는 작품인 <오발탄>을 연출한다. 전후 서울의 빈민가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가난한 사람들의 비극을 다루면서도 연민이나 교훈을 강요하지 않는다. 인물들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다만 ‘옳게 살 수 없는 구조’ 속에서 조금씩 파괴되어 간다. 영화의 마지막에 울려 퍼지는 “신이 버린 오발탄”이라는 외침은 해결도 희망도 아닌, 분단시대를 향해 던져진 질문에 가깝다. 이 작품은 한국 영화사에서 리얼리즘의 정점으로 평가받으며, 유현목을 대표적인 작가주의 감독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유현목 감독의 첫 영화 교차로(1956)
    유현목 감독의 첫 영화 교차로(1956)

    유현목은 검열 시대의 감독이었다. 어떤 때는 정면으로 부딪쳤고, 어떤 때는 우회했고, 또 어떤 때는 제도 안으로 들어가 영화를 만들었다. 이 점에서 유현목은 한 개인의 윤리뿐 아니라, 한국 영화가 처한 구조적 조건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내는 감독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엄혹한 시절에도 그의 영화들 <순교자>, <잉여인간>, <김약국집 딸들>, <장마>, <사람의 아들> 등은 당대 최고의 영화로 기록된다. 한국영화계에서 뽑는 역대 베스트원 영화에 <오발탄>이 수십 년간 올라 있었던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말년에 이르러 그는 점차 연출 현장에서 물러나 영화교육자로서의 역할에 집중했다. 특히 동국대학교에서의 활동을 통해, 감독을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라 사유하고 책임지는 지식인으로 인식하는 영화관을 후학들에게 전했다. 영화는 오락이기 이전에 시대를 기록하는 예술이며, 감독은 그 기록에 윤리적으로 응답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은 한국 영화교육에 중요한 유산으로 남았다.

    동국대 제자들과 수업 중인 유현목 교수(1991)
    동국대 제자들과 수업 중인 유현목 교수(1991)

    동국대 영화교육에 대한 그의 가장 큰 공헌은, 감독을 기술자가 아닌 지식인, 예술가로 규정한 점이다. 그는 영화를 오락이나 산업 성과로만 평가하지 않았고, 감독이 시대와 사회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태도는 동국대 영화과가 이후에도 비교적 일관되게 유지해 온 작가주의, 현실주의적 전통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제도적으로도 그의 존재는 중요했다. 유현목은 동국대가 영화·영상 분야를 본격적으로 학문 영역으로 인정하고 확장하는 데 있어 정신적 중심축 역할을 했다. 그의 이름은 학교가 영화교육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상징 자본이었고, 이는 동국대가 이후 한국 영화교육의 주요 거점 중 하나로 자리 잡는 데 기여했다.

    2004년, 유현목은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의 얼굴로 기억될 수 없는 감독이다. 리얼리스트 감독이었고, 실험주의자였고, 저항자이자 제도 내부의 실천가였으며, 학문과 후학양성을 하는 교수로서도 질문을 멈추지 않았던 영화인이었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한 개인의 영화사가 아니라, 한국 영화가 겪어온 모순과 질곡의 역사에 가깝다.

    천의 얼굴 영화감독 유현목 도서 표지

    <정재형, 『천의 얼굴 영화감독 유현목』 저자>

  • 이해랑 프로필 사진

    이해랑

    1916~1989


    한국 연극의 영원한 주연이자 동국 연극의 대들보

    이동극장 차량 및 간이무대
    이동극장 차량 및 간이무대

    이해랑(1916~1989)은 한국 연극사의 주연 배우다. 인생이 한 편의 연극이라면 그는 배우, 연출가, 국회의원, 교수 등 다양한 배역을 소화한 명배우였다. 왕가의 후예로 태어나 천시받던 배우를 선택했다는 점부터 그의 인생은 극적이다. 그는 유복하게 자랐으나 힘든 어린 날을 보냈다. 어려서부터 친모와 유모를 차례로 잃었고 누명으로 두 번이나 유치장에 갔다. 슬프고 억울했던 청춘은 니혼대학 예술과에 입학하여 비로소 안식처를 찾았다. 연극은 그에게 평생 머물 곳이 되어 주었다.

    연극 공부에는 고난도 잦았다. 그는 유학 시절 도쿄학생예술좌의 제2회 공연인 <춘향전>의 단역으로 처음 무대에 올랐다. 예명도 이맘때 지은 것으로 본명의 마지막 글자에 良에 삼수변氵을 더한 것이다. 배우가 되다 못해 이름까지 바꿨다는 문중의 꾸짖음과 유학 중 겪은 모진 고문, 일제의 가혹한 검열과 가난도 그의 길을 막지는 못했다.

    그는 평생토록 진실된 연극, 리얼리즘 연극을 추구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불가능한 꿈이었다. 그는 친일의 설파는 물론 이를 위한 과장된 연기를 거부했다. 마찬가지로 연설적이었던 좌익극과 신파극도 그는 맹렬히 비판했다. 강점기에는 친일극을 하지 않고는 연극을 이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이해랑처럼 단호히 판을 잠시 떠났던 이는 많지 않았다. 그런 만큼 그의 목소리에는 울림이 있었다. 그는 좌익극과 신파극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냈다가 동료이며 친구였던 이들에게 협박과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이동극장 공연을 보기 위해 모인 관중들
    이동극장 공연을 보기 위해 모인 관중들

    어려움 속에서도 이해랑은 왕성히 활동했다. 해방 후 신협을 창단하여 한국 사실주의 연극의 황금기를 열었다. 그에게 동료들이 모여들었던 데에는 진지한 태도와 탁월한 실력이 한몫했다. 그의 기량은 신인 시절부터 돋보였다. 대학 졸업 후 가입한 고협에서는 <무영탑>의 아사달 역을 맡아 유망한 신인으로 눈도장을 찍었다. <마의 태자>에선 조역 이종자 역을 맡아 ‘지성파 배우’라는 호평을 받았다. 그의 완숙기인 1962년 연출과 주연을 맡았던 <밤으로의 긴 여로>는 한국 연극사에 남을 명공연이다.

    평론가 여석기는 “당대 무류(無流)”, 극작가 이근삼은 “크나큰 감명”으로 평했다. 이 공연으로 그는 예술원상을 수상했다. 1966년부터는 6년간 이해랑 이동극장을 운영하면서 지방에 연극을 보급하는 데 힘썼다. 이동극장이 운행되는 동안 천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연극의 즐거움을 누렸다. 이동극장은 이해랑의 유연성을 보여준다. 그는 평생 지향해온 극장에서의 사실주의적 연출을 포기하면서도 더 많은 사람이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무대 안팎에서 보여준 리더십은 전방위적이었다. 도쿄학생예술좌의 3대 회장이었고 국립극단의 초대 극장장이자 신협의 리더였다. 한국전쟁 시에는 문예중대를 이끌고 군사훈련을 받으면서도 전선을 돌며 위문공연을 올렸다. 8대, 9대 국회의원으로서는 문화예술진흥법 제정을 주도한 뒤 미련 없이 본업으로 돌아왔다. 그뿐만 아니라 6회 예술총회 회장에 당선되어 10회까지 연임하면서 예술인들의 권리 증진에 힘썼다.

    동국대 이해랑예술극장
    동국대 이해랑예술극장

    이해랑은 뛰어난 교수이기도 했다. 그의 관록과 지식은 동국대학교 연극학부의 기틀을 다지는 대들보였다. 국회의원 시절을 제외하고 1961년 연극과 교수로 임용되어 정년 때까지 교단을 지켰다. 그는 배우가 무대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전수한 예술의 정수는 다음으로 정의된다. “우주처럼 광대하게 사유하고 별처럼 작게 표현하라.” 싫은 소리하지 않는 연출가였던 그는 학생에게도 너그러웠다. 그의 날개 아래서 한국의 극예술을 주름잡는 명배우와 감독들이 배출되었다.

    그는 여전히 동국대학교 캠퍼스의 당당한 주연이다. 혜화문 옆 이해랑 예술극장은 한국 최초로 예술인의 이름을 단 건축물이다. 이곳은 박제된 기념관이 아니다. 개관부터 매년 유수의 극단들이 성심껏 준비한 공연을 올린다. 역사 깊은 동국대학교 연극학부의 산실이기도 하다. 그의 정신과 예술관이 뿌리로 살아 숨 쉬는 이곳에서 제2, 제3의 이해랑을 꿈꾸는 청춘들이 오늘도 줄기를 뻗어 올리고 있다.

    대가로의 긴 여로, 이해랑 도서 표지

    <허재홍, 『대가로의 긴 여로, 이해랑』 저자>

  • 노희두 프로필 사진

    노희두

    1939~1960


    이승만 독재를 끝낸 고귀한 희생 · 4·19혁명 열사

    4·19 혁명 당시 동국대생들의 거리 행진
    4·19 혁명 당시 동국대생들의 거리 행진

    노희두(1939~1960) 열사는 충남 서천에서 출생하여, 장항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8년 동국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입학 후 노희두는 한눈파는 법 없이 법학 공부에 매달렸다. 당시 법학은 신생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인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이념을 법치 아래 실현시키려면 반드시 필요한 실용 학문이자 고등 학문이었다. 법학은 노희두의 적성에 딱 맞는 학문이기도 했다.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사고력, 공정한 판단력, 자신의 주장을 정확하고 소신 있게 표현하는 능력을 요구하는 학문이 법학이었기 때문이다.

    1960년 봄, 이 해 봄학기의 학내 분위기는 예년과 사뭇 달랐다. 3·15 부정선거와 마산에서의 1차 항쟁에 이은 2차 항쟁을 주시하던 전국 대학생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은 것은 ‘열일곱 살 김주열 군’의 희생이었다. 치명적인 성능 탓에 직사를 금하고 있는 미제 최루탄이 눈 부위에 박힌 채 시체로 떠오른 김 군의 모습이 신문에 보도되었던 것이다. 노희두는 4월 18일 저녁, 평소보다 일찍 서둘러 귀가했다. 그리곤 장위동 하숙집의 단출한 살림살이와 책들을 가지런히 정리해 놓았다. ‘노희두의 출사표’였다.

    4·19 혁명 당시 제일 선두에 선 동국대 학생들
    4·19 혁명 당시 제일 선두에 선 동국대 학생들

    4월 19일 이른 아침, 동국대학교 대학본관 석조관 앞 광장에 학생 2천여 명이 모였다. 몇몇 학생이 앞으로 나와 선언문을 읽고 구호를 선창했다. 시위대 선두에 빨간 바탕에 흰 글씨로 ‘동국대학교’ 교명 다섯 자가 쓰인 대학 깃발이 앞장섰다.

    동국대는 경무대로 가자! 누군가 외쳤다. 구호가 끝나기 무섭게 동국대 시위대는 서울 각 대학의 연합 시위대가 모여 있는 국회의사당 앞을 떠나 경무대 쪽으로 진출했다. 노희두는 선두 대열을 지키며 ‘동국대학교’ 플래카드를 들고 달려나갔다. 그 옆에 철학과 김항배가 있었고, 바로 뒤에 영문과 선배 허천택이 따르고 있었다. 선두그룹은 여전히 법학과와 정치학과가 주류였다. 동국대 시위대가 광화문 사거리 쪽으로 짓쳐나가자 주변에 몰려 있던 대광고, 동성고 학생들이 “와!”하고 함성을 지르며 따랐다. 돌풍이었다. 동국대 2천여 명이 돌풍처럼 내달리며 경무대로 가자고 외친 순간부터 혁명이었다.

    동우탑과 노희두 열사 흉상(사진 왼쪽)
    동우탑과 노희두 열사 흉상(사진 왼쪽)

    법학과 3학년이었던 노희두 역시 동국대 시위대 2천여 명과 함께 효자동을 거쳐 이승만 대통령이 머물고 있던 경무대로 향했다 오후 1시 30분 경, 시위대를 향해 발포한 경찰의 총알이 동국대 시위대 선두에 서 있던 노희두의 가슴을 관통하며 노희두는 4·19혁명 경무대 앞 첫 희생자가 되었다.

    경찰의 총격에 맨 먼저 쓰러진 사람이 동국대 노희두임을 목격하고 증언한 사람은 총격을 피해 바로 옆 민가 담으로 피신해 있던 동아일보 기자였다. 총소리가 울리자 선두에 서 있던 학생이 가슴을 부여잡고 가장 먼저 쓰러졌고, 그가 바로 민주혁명 제단에 첫 피를 바친 노희두 열사였던 것이다. 총알은 노 열사의 흉부 바로 밑을 뚫고 척추를 관통했다. 노희두 열사의 유해는 순화병원을 거쳐 백병원에 안치되어 있었으나 신원 확인이 되지 않았다가 나중에 급거 상경한 유족에 의해 노희두 열사임이 밝혀졌다.

    1960년 4월 19일 오후 1시 40분경, 노희두 열사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4·19는 완전한 민주학생혁명으로 승화한다. 민주혁명 제단에 바쳐진 노 열사의 뜨거운 피가 4월 25일의 대학교수단 시위를 촉발하고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곧 독재의 아성을 무너뜨린 것이다.

    노희두 열사의 영결식은 1960년 4월 23일 토요일, 서울 명동천주교성당에서 치러졌다. 이후 노희두 열사의 유해는 성동구 천주교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63년 9월, 서울 강북구 수유리에 4·19기념묘지가 조성되면서 유공자를 모신 제1묘역 98번에 안장되었다. 4·19기념묘지는 1995년 국립묘지로 승격되었고, 2006년 제정된 시행령으로 ‘국립4·19민주묘지’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4·19 민주묘지에 안치되어 있는 노희두 열사의 묘
    4·19 민주묘지에 안치되어 있는
    노희두 열사의 묘

    한편 동국대학교 학생자치위원회는 1960년 11월, 4·19혁명 기념탑을 건립하고 ‘동우탑’이라고 이름짓는다. ‘동우탑’의 노희두 열사 비문은 1966년 4월 19일, 당시 총학생회 이름으로 새긴 것이다. 이후 ‘동우탑’이 세워진 만해광장 동북쪽 언덕은 동국대학교 학생민주운동의 성소로 거듭난다. 노희두 열사의 흉상이 ‘동우탑’ 옆자리에 세워진 것은 혁명 후 50년의 세월이 흐른 2010년 4월 19일의 일이다.

    동국대학교에서는 해마다 4월 19일이 되면 ‘국립4·19민주묘지’에서 기념식을 거행하고 노희두 열사의 묘에 참배한다. 그리고 ‘동국인’이라고 통칭하는 동국대학교 동문, 학생, 교직원들이 참가하는 ‘4·19혁명기념 동국인등반대회’(제1회 1970년)를 연다.

    2026년 올해는 노희두 열사가 꽃다운 나이로 산화한 지 66년째, 4·19혁명 66주년이다. 스물두 살의 짧은 생애였지만 대한민국 민주 혁명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혁명 열사 노희두 열사의 묘역에도 그의 혁명혼을 기리듯 봄꽃은 피고 산새 소리가 청아하게 울려퍼질 것이다.

    4.19 혁명 열사 노희두 도서 표지

    <정희성, 『4·19 혁명 열사 노희두』 저자>

  • 최혜정 프로필 사진

    최혜정

    1990~2014


    하얀 연꽃으로 피어난 참스승

    혜정이 제작한 학회소모임 ‘그루터기실록’ 표지
    혜정이 제작한 학회소모임 ‘그루터기실록’ 표지

    최혜정(1990~2014)은 서울시 방배동에서 1990년 11월 26일 아버지 최재규, 어머니 송명순의 2녀 1남 중 장녀로 출생하였다. 방배동 아람유치원을 다닌 후 1997년 동작초등학교에 입학하여 다니다가 2002년 안산시 슬기초등학교에 전학하였다. 그 후 안산 양지중학교를 거쳐 안산 고잔고등학교를 2009년 졸업하였다. 재학 시 올곧은 국가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공군사관학교에 진학하고자 하였다가 역사 인식을 실현하고자 교사를 양성하는 동국대 역사교육과에 진학하였다. 역사를 탐구하면서 한편으로는 세계 무대를 꿈꾸며 부전공으로 영어통번역학을 선택하였다. 2013년 사범대학을 최우수로 졸업하고 그해 교사임용시험에 합격하였다. 안산 단원고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가 2014년 4월 제주도 수학 여행길에 올랐다가 바다에서 산화하였다.

    어쩌면 매우 평범한 교사로 제자를 가르친 스승이었지만 그가 보여준 죽음의 순간만은 유독 남달랐다.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몸을 기꺼이 버린 숭고한 정신을 펼친 참스승이었다. 평상시 가정에서 습득한 올곧은 정신과 학교에서 체득한 공동체 생활 정신의 발로였다. 특히 우리를 소중히 하던 불교의 가르침의 소산으로 하얀 연꽃으로 다시 꽃 피운 것이다.

    역사교육과 제32회 탁본전시회에서 동기들과 함께(2010)
    역사교육과 제32회 탁본전시회에서 동기들과 함께(2010)

    최혜정은 동국대 역사교육과에 지원하여 영어영문학부 영어통번역학전공을 복수전공하면서도 사범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역사교육과에 지원하여 사범대학에 수석 입학하여 졸업 때까지도 수석을 놓친 바 없었다. 항상 정답에 가까운 답안지를 내놓아 교수님들의 총애를 받는 학생이었다. 과제는 다른 학생들보다 분량도, 내용도 뛰어났을 만큼 성실하였다.

    제1회 기억의 날 추모제
    제1회 기억의 날 추모제

    학과 강의뿐만 아니라 학과의 학생회와 동아리 학회 활동도 열심히 한 역사교육학도였다. 선배들에게도 열성적이고 멋진 후배로 기억에 남았다. 그루터기의 부학회장을 맡아 학회 자료집인 "그루터기 실록" 발간의 총 책임을 맡기도 했다. 학과의 대표적인 학생활동인 탁본 및 전시회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였다.

    ‘잊지 않겠습니다’ 추모비 제막식
    ‘잊지 않겠습니다’ 추모비 제막식

    졸업 후 고향인 안산 단원고 교사로 부임하여 제자들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2014년 4월 16일 2학년 9반 학급 담임 선생님으로서 수학여행을 떠났다. 세월호 배에 탑승하였는데 갑자기 침몰하기 시작하였다. 승객 476명 중 겨우 172명만이 구조되었고, 나머지 304명이 목숨을 잃는 대참사가 발생하였다. 그는 선박 5층에서 3층으로 내려가 학생들을 대피시키고 객실 곳곳을 돌아다니며 상황을 살피다가 구명조끼 없이 배에 남고 말았다. 그는 학생들에게 “너희, 내가 책임질 테니까 갑판으로 올라가”라고 말한 후, 많은 학생들이 볼 수 있도록 SNS에 “너희부터 나가고 선생님 나갈게”라는 글을 남겼다. 그리고 학생 10여 명을 구조한 뒤 끝내 배와 함께 가라앉았다. 스승으로서 자기 책임을 다하고 ‘하얀 연꽃’으로 다시 피어난 것이다.

    그는 1990년 11월 26일부터 2014년 4월 16일까지, 총 23년 4개월 22일 짧디짧은 생을 살았다. 생사가 급박한 순간에서도 제자들을 살피다가 살신성인행을 보여주었다. 선생님으로서 늘 제자들이 바른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인도하며 함께 걸어갔던 ‘참스승’이었다.

    역사교육과는 ‘기억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매년 4월 16일 교정 사제동행비 앞에 세워진 추념비 앞에서 추모 행사를 열고 있다. 참사 2년 뒤인 2016년에는 역사교육과에 “최혜정 동문 장학”이 설립되었다. 교내 동료 교수인 김호성, 고영섭 교수 등이 추념시를 작시하여 역사교육과가 모태가 된 역사와 교육 학술지에 게재하기도 하였다. 너무나도 평범했던 한 인간 최혜정의 죽음은 나와 남, 우리라는 역사와 불교의 공동체 정신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한다.

    연꽃으로 피어난 참스승, 최혜정 도서 표지

    <동국대학교 역사교육과 역사편찬원, 『연꽃으로 피어난 참스승, 최혜정』 저자>